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문단 편집) == 상세 == 응우옌푹아인은 구 [[후 레 왕조]]가 명목상으로 존속한 시기인 [[응우옌씨 정권]](광남국)의 8대 국왕 [[응우옌푹코앗]]의 손자로 광남국의 왕족이다. 응우옌푹아인의 아버지 [[응우옌푹루언]](흥조)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옥에 갇혀 응우옌푹아인의 나이 3살때 사망한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던 응우옌푹아인은 응우옌푹코앗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응우옌푹투언]]과 간신 쯔엉푹로안(Trương Phúc Loan, 張福巒, 장복만)의 횡포로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광남국이 멸망, [[응우옌푹즈엉]]을 비롯한 광남 응우옌씨들이 대부분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홀로 탈출해 [[시암]]의 [[라마 1세]]에게 지원받은 군대를 토대로 정권 재건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5세였다. 떠이선 일족이 반란을 일으킨 후인 1780년대부턴 이미 떠이선 세력들이 [[떠이선 왕조]]를 세우고 황제 노릇을 하던 중이였다. 응우옌푹아인은 간신히 자딘을 포함한 남부를 수복하고 떠이선과 3번 충돌했으나 다 실패했고 한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참혹한 패배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미얀마]], [[마카오]], 시암, 베트남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인 선교사 [[https://ko.wikipedia.org/wiki/피에르_피뇨_드_베엔|피에르 피뇨 드 베엔]]을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고 나중엔 피뇨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탄약, 무기, 병사들을 징집한 후 응우옌푹아인도 [[포르투갈]], [[영국]], [[캄보디아]] 병력들을 징병한 결과 다국적군을 구성하고 1802년 [[꾸이년]]에서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떠이선 황제 [[깐틴|깐틴 황제]]를 격파한 후 도망간 서산 일족을 모조리 잡아들여 탕롱에서 떠이선 일족과 그 신하들을 남김없이 처형해 1802년 베트남을 다시 통일한다. 이후 1804년 국호를 [[대월]]에서 '''대남(大南)'''으로 바꾸고 1806년엔 칭황식을 올려 [[외왕내제]], 황제가 되고 1815년엔 중국식 유교제도를 모방한 가륭율례(嘉隆律例)를 반포해 구시대적인 유교 제도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캄보디아, 라오스에 내정간섭을 하여 후대 [[민망 황제]] 시기의 전성기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는 한편 국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등단궁]](登壇宮)》이라는 국가를 지어 사용했다. 이 국가는 [[응우옌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을 빌려 왕조를 개창한 결과 [[프랑스]]의 압박이 없을 순 없었고 [[프랑스]]의 선교에선 당시 [[한자문화권]] 국가중 유일하게 외형적으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속으론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싫어했기에 아들 [[민망 황제|민망]], 손자 [[티에우찌 황제|티에우찌]], 증손자 [[뜨득 황제|뜨득]] 때에 폭발해 프랑스와의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여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화가 되는 걸 앞당겼다.[* 아들 민망에게 죽기 전 유럽, 프랑스에게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라고 했다.] 한국사의 [[신라]]는 처음에 당나라의 힘을 빌렸으나 이후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를 쫓아내서 스스로 상황을 정리했고 이에 따라 [[문무왕]]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면 자롱 황제가 개창한 응우옌 왕조는 결국 외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훗날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 때문에 오늘날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프랑스와 접촉했다는 점에서, 근대식 무기를 들여왔기에 자롱 황제의 등극은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평가도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